누구에게나 육신의 고향은 어머니입니다. 아주 조그만 수정란이 어머니 뱃속에서 10 개월동안 자라면서 아기로 태어납니다. 아기로 태어나서도 1 년 정도는 어머니의 전적인 돌봄을 받습니다. 돌 전후로 걷기 시작하면서 어머니 품을 떠나서 이리 저리 돌아다니지만 어머니 주위를 맴돌 뿐입니다.
저는 어린 시절이 조금 남달랐습니다. 제가 둘째인데 형과 나이 차이가 1 년 4개월입니다. 그러다가 저를 낳으시고 1년 6개월 후에 동생을 낳으셨습니다. 일하는 사람이 있었지만 약하신 몸으로 아들 셋을 연년생으로 낳고 힘들게 키우셨습니다.
아버지께서 공무원이셨기에 아버지 월급으로 세 형제를 키우기 힘드셔서 제가 국민학교 들어가기 전부터 작은 인쇄공장을 설립하여 운영하셨습니다(해태제과에서 나온 왕드로프스 껍질 제작). 당시 연세가 30대 초반인데 작은 공장이지만 공장을 설립하고 운영할 정도로 배포가 크셨습니다.
국민학교 들어가기 전 여름에 어머니께 한글을 배운 기억이 납니다 (선행학습?). 교육열이 남달라서 동대문에 살면서 우리 세 형제 모두 광화문에 있는 덕수 국민학교를 다녔습니다. 이미 당시에 위장전입을 한 것입니다. 중학교 1학년때에도 어머니께 영어를 배웠습니다.
이렇게 삶의 대부분을 어머니를 의지하며 살다가 제가 중학교 2-3학년쯤 되었을 때 최소한 지식적으로는 어머니를 넘었습니다. 제가 대학교를 다닐 때쯤에는 어머니께서 저를 의지하기 시작하셨습니다. 그래도 어머니는 워낙 의지가 강하시고 재능이 많은 분이셨기 때문에 제게 오랫동안 큰 분으로 남아 있었습니다.
몇 년전 빅토리아에 살 때 어머니 집에 갔는데 주무시고 계셨습니다. 그런데 침대에 누워 계신 모습이 너무나 작아보였습니다. “어머니가 이렇게 작으셨나?” 생각할 정도였습니다. 연세가 꽤 드셨어도 체격은 그리 줄지 않았는데, 왜 그렇게 작게 보였는지 모르겠습니다. 그때부터 어머니는 제게 작은 분이 되셨습니다.
10 년전쯤 임파선 암을 앓으시고 그후 신장투석을 지금까지 계속 하고 계십니다. 나름 건강관리를 잘 해오신 편인데 이제 사실 날이 얼마 안남은 것 같습니다. 작년 가을에 요양원에 들어가셨는데, 부모님을 뵈러 한 번 가려고 해도 코로나때문에 그동안 못가고 있었습니다. 얼마전에 영상통화를 하는데 눈물을 글썽이시면서, “병희야, 내가 죽게 되면 와라”라고 하시는 말을 들으면서, 더 늦기 전에 기력이 조금이라도 더 남아 있으실 때 뵙는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. 형에게 얘기하니까 저를 보고 싶다고 하면서 우신다고 합니다. 이번에 밴쿠버에 가서 돌아가시기 전에 잠시라도 뵙고 오려고 합니다.